세월에 묻혀 희미해진 추억의 빗장을 풀고

추억의 빗장을 풀고
오늘의 나 되도록 삶의 뒤안길에서 희미하게나 추억으로 그려지는 삶의 그림들. 쾌쾌한 벽장 속 후미진 곳에 잊혀진 채 누렇게 바래 버린 일기장을 찾아들고 설레는 맘으로 열어본다. 누렁 코 소매 춤에 훔쳐가며 해말게 뛰놀던 어린 시절. 볏짚 줄 돌돌 말아 공차며 몰려다니는 동네아이들, 냇가에서 둘러 앉아 우둘투둘 널빤지에 묶은 때 씻어내는 빨래터 어머니들, 골짜기 물길 따라 춤을 추며 흘러가는 낙엽들이 바위 앞에 어지럽게 맴을 돈다. 손가락 노 되어 길을 터면 고맙다고 절을 하듯 한 바퀴 뱅글 돌곤 제 길을 떠나간다. 가을바람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물결치는 이삭들, 농부의 수고 진 이마에 구슬땀 흐르나 입가엔 미소가 드리운다. 알알이 들어찬 벼이삭들 고개 숙여 감사하듯 바람결에 서로 비벼댄다. 곱지 않은 새떼의 눈길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언제나 늘 그곳에 선 허수아비.

허수아비 근성
비탈진 산기슭에 심긴 감나무 위의 홍시처럼, 늦가을 새벽 찬 서리에 찢어진 살갗 새로 드러난 빨간 석류 알처럼, 새색시 시집가는 날 부끄러움에 붉어진 볼처럼, 기울어가는 한 세월 멀어져 가는 태양 빛 붉은 노을처럼, 바다를 떠나 저 태어난 고향 길로 접어들며 붉게 물들어 가는 연어 떼처럼, 나도 붉게 물들어 익어가고 싶다. 가을에 여민 가슴속 깊은 곳에 품은 꿈에 색깔을 넣고 싶다. 주님의 피로 붉게 물든 십자가 품고 영글어 가기까지 새벽 찬 서리 마다않고 오늘도 내일도 기도 무릎, 감사 무릎, 돌봄과 사랑, 선행과 격려 무릎으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허수아비 근성으로 끈기 있게 내일을 살고 싶다. 한 번 벌린 팔 오므리지 않고 누구나 안아주는 그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어주고 싶다. 거친 천위에 그려진 웃는 모습 모진 비바람 속에 젖어가도 지워지지 않는 웃음으로 세상을 웃게, 농부를 웃게, 이삭을 웃게 그리고 하늘을 웃게 하고 싶다. 때가 되어 알곡은 곳간에 들여지고 내가 꺾어지는 그날까지 피곤해 주저앉지 않고, 지루해 한 눈 팔지 않고, 외로워 가슴을 찢지 않고 우직함으로 살아가는 허수아비이고 싶다. 사랑으로 띠를 두르고, 들녘을 지나는 나그네의 벗으로 살고 싶다. 언제나 같은 모습, 같은 미소, 같은 가슴으로 한 번 선 그곳에서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2-25).

최순철 - 10/2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