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이 주는 희망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 중에 ‘오랜 세월 동안 건드리기만 해도 아팠던 장미 가시 같은 실연의 기억이 이제는 건드릴 때마다 은은한 향기를 내는 사랑의 추억이라는 예쁜 향주머니가 되었다’는 글이 있습니다. 실연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지난 세월만큼이나 향을 묵히고, 묵묵히 피어날 만을 기다려 왔던 것이지요.

지난 밤. 폭우성 장대비가 뒤뜰에 키워온 작물들을 넘어뜨렸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넘어진 작물을 바로 세워보았습니다. 눌리고, 꼬이고, 모진 비바람에 휘둘려진 줄기들이 힘겹게 걸쳐졌지만 다시금 모양을 되찾아 가리라 생각했습니다.

여름 장마가 기승을 부릴 때면 지금도 생생한 잠수교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하루는 게릴라성 폭우로 갑자기 잠수교가 잠겨가고 있었습니다. 몇몇 차량은 이미 꽁무니를 감추며 달려가고 있었고, 저는 조금 떨어져서 잠수교로 진입하고 있었지요. 다리를 타고 내려가는데, 좌우에 펼쳐진 한강물을 보는 순간 괜히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고 후회가 막급했습니다. 아직은 다리가 잠기지 않았지만 난간을 찰싹거리는 흙탕물이 조금씩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리 중간 즈음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자동차 바퀴 반절만큼 물의 수위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위로는 다리에 막혀 하늘이 보이지 않고, 사방으로 가득한 흙탕물에 좌우 분간이 어려웠습니다. 건너야 할 잠수교 끝자락의 난간은 보였지만 물에 잠겨가는 중간은 이미 끊어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난감한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엑셀레이더를 밝아야 하는 다리는 힘이 빠져가고, 물속에 빠져있는 자동차 바퀴는 공회전을 하면서 겨우겨우 움직여주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절박한 순간이었지요. 1,2분의 짧은 거리였지만, 그 순간은 참으로 기나긴 세월을 보낸 것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빠져나오면서 거울로 보이는 뒷모습은 오랜 세월 잊혀 지지 않는 서늘한 흔적으로 남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금 잠수교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곳에 흘러간 강물이 한강 둑 넘기 직전이었음을 말해주는 수위의 흔적이 바로미터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물들이 그곳을 채워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장마철이 되면 잠수교를 넘기는 강물들이 범람하여 수위의 신기록을 세워오고 있겠지요.

시련의 흔적은 희망의 바로비터입니다. 은혜의 강물도 마찬가지이지요. 영혼이 거듭났던 그날에 새겨진 은혜와 사랑의 수위는 삶을 거듭하면서 그 기록을 갱신해 주십니다. 가뭄에 강바닥이 텅빈 채 매말라도 언젠가 다시 그 강에 물이 가득 흘러갈 날이 오는것 처럼, 오늘 우리의 상황과 현실이 지치도록 끈질기게 머무르며, 심령을 가물게 해도, 견디며 기다리면 반드시 은혜의 강물에 심령이 촉촉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자연의 섭리 속에서 배우게 됩니다. 견디고 품어내는 세월 만큼이나 우리의 미래는 희망의 향기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힘내세요!

최순철 - 08/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