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6장 21-27절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르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지난 시간에는 ‘다시 가슴이 뛴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 세친구들은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속에서 다시 가슴이 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향하게 하는 설레임을 일으켰습니다. 왕들마저도 가슴이 뛰게 했습니다. 이 소문은 소문에 소문을 이어 퍼져갔습니다. 소문을 접했던 백성들의 가슴도 뛰었습니다. 십자가를 죽으신줄로만 알았던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주님의 가슴이 다시 뛰셨습니다. 주님의 뛰신 가슴은 흑암의 권세인 죽음을 깨드리신 역사였습니다. 죄악에 묶여있던 인류를 자유케 하는 새창조의 역사였습니다.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 영광의 길이 임하는 축복의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가슴이 뛴 사람들. 그들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풀무속에, 사자굴속에 기꺼이 던져짐으로 다른 사람들의 가슴조차 뛰게 했던 중심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저들로 하여금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게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가치체계에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의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세상의 가치체계로 이루어져 있던 내가 새로운 가치체계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 전에 상태를 설명합니다. “전에는 나만을 위하여 살았던 자였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변화 가치혁명

교회는 진정한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만났다는 말은 악수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누는 정도의 만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만남은 마태복음 13장 천국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루 서 말이 한줌의 누룩을 만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본질이 변화되는 것을 진정한 변화라고 합니다.

첫째로 상황과 조건의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출애굽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출애굽 백성들처럼 상황과 조건의 변화로 따지면 이처럼 엄청난 상황과 조건의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430년이라는 긴세월.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것은 오로지 노예라는 상황뿐이었습니다. 이 백성들이 과거에 나라가 있었습니까? 영토가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지나온 430년 노예생활뿐이었습니다. 노예생활이 무엇입니까? 채찍입니다. 가난입니다. 헐벗음입니다. 배고픔입니다. 온갖 질병에 걸립니다. 인권은 유린당합니다. 불행합니다. 모든 비극을 종합적으로 표현한 말이 노예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상황과 조건을 완전히 바꿔 주셨습니다.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보았습니다.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던 사건은 인류 전 역사를 따라 반복해서 말씀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천상의 음식인 만나를 먹었습니다. 반석으로부터 솟아나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지키고 계시는 하나님. 하루도 빠짐없이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역사를 날마다 경험했습니다. 기적에 파묻혀 죽을 만큼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이렇게 확실하게 보여 주실 수가 있습니까?

바로의 폭정에 시달렸던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조건과 상황을 다 바꿔 주신 거예요! 상황이 바뀌고 조건이 바뀌었는데, 이런 변화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치관을 달라지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백성들 중심에는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백성들은 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진리로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절해왔던 그 때 그 사람들이었지,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토록 엄청난 기적과 역사 앞에서 왜 저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을까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그런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믿을 수 없습니다. 나를 움직일수 없는 믿음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이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같은데 변화가 아닌게 있습니다. 전심이 아닌 진심만의 변화는 변화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8:18절 이하에 보면 부자관원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모태신앙입니다. 귀족이었습니다. 관원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젊은데 돈 있고, 권력 있고, 귀족이었다면 오늘날로 타락의 극치를 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달랐습니다. 18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20절에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1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대단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이 청년이 이날 저녁 예수님을 찾아온 것만 보아도 진심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들통나면 관원직을 박탈당합니다. 위험을 무릎쓰고 찾아온 것입니다. 진심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려서부터 간음을 행한적이 없어요. 남을 미워한 적도 없어요. 도둑질한 적도 없어요. 거짓말한 적도 없어요. 부모마저도 공경했던 효자였어요. 진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인간을 꼽으라면 바로 이 청년입니다. 이렇게까지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저에게 상담을 하려고 왔다면 심히 부담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의 중심 속에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할 수 없는 두 개의 진심이 갈등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사람 마음 안에는 언제나 두 진심이 존재합니다. 하나의 진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진심은 세상도 사랑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두가지 진심을 가지고 자신을 위로합니다. 내가 영생을 필요로 할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듯한 몸부림을 칩니다. 모든 종교적 행위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다른 진심 하나로는 물질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청년속에 물질을 붙들고 있는 진심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두 진심사이에 전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22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 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젊은이처럼 양자 택일의 진심사이에서 갈등해야 할때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런데 우리는 이 두가지 다 가지고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버릴 수 없거든,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심히 근심하려거든 아예 벌지도 마십시오.

세상으로부터 왔습니다. 세상은 사단의 구조아래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두 나라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이의 속을 뒤집었습니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청년은 자기 내면속에 존재하는 두 가지 진심 앞에서 고민했습니다. 지금까지 진진하게 영생을 구해왔던 젊은이가 “영생이 눈 앞에까지 와 있는데”잡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만이라면 성경 속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꼽으라면 이 젊은 청년일 것입니다.

이때 심각한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듣고 있던 제자들이 공통적으로 물었습니다. 눅18:26절“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며 충격적으로 던진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 하나도 없겠습니다!. 여기 목회현장에서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십니다! 주여! … 이때 주님이 머리를 극적극적하시면서 ‘내가 좀 너무했지? 좀 감정이 앞섰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싹 잘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야!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야! 신적인 간섭이 없이는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심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속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 중심이 바꾸지 않는한 진정한 변화는 없습니다. 진심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례 : 부흥회에서 장로님 한분을 만났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에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없는 분이 순전히 독학으로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은 가짜로 만들어서 은행에 취직을 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실력을 인정받고 이제 은행장까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집회를 통해서 복음 앞에 섰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지난날 자신의 학력을 속였던 진심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에 대한 진심으로 거짓에 대한 진심을 깨드려 부셨습니다. 이분은 통곡을 하며 엎드렸습니다. 그 다음날 은행장에게 찾아가 자신의 허위 학력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렇게 하고 문을 나서는데, 그동안 그것 때문에 눌려서 괴로웠던 것이 한 순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날로부터 다시 가슴이 뛰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멈추어주셨던 심장이 장로님의 가슴에서 다시 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복음에 전심 전력하는 충성스러운 장로님이 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속에 두 가지 진심을 충돌시켜 보아야만 무엇을 전심으로 따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경외하는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무시를 당하시고, 로마서 22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도다! 하나님이 왜 우리 때문에 모독을 받아야 합니까?

그분이 나 때문에 챙피를 당하셔야 합니까?

요즘보다 더한 상황속에서도 진실하게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해드렸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예수이름으로 진실되이 살아가야할 우리가 너무나 거짓말을 잘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해요.

레갑에게 부탁

예레미야 35장에 보면 태어나기 전부터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렘1:4-10),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전 역사중에 가장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왕을 걸쳐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외롭고 고독한 선지자의 길을 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총체적으로 타락과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백성들에게 한 족속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레갑족속입니다.

역사적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을 위해서 통치자로 세워졌던 예후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예후는 사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저에게 좋았을 왕이었습니다. 예후 전에 아합왕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완전히 우상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비참한 왕이었습니다. 이 왕을 치시기 위해 막대기로 쓰였던 왕이 예후였습니다. 예후가 칼을 휘둘러 우상을 척결할 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잔악함을 더해 진노를 쏟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악독한 야망을 채운 인간이 예후입니다. 이때 함께 개혁에 참여했던 사람이 레갑입니다. 그가 개혁에 참여하면서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이 개혁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이었스니다. 레갑의 중심에 하나님의 중심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개혁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채우다가 저주 받아 망해버린 인생이 있는가 하면, 같은 개혁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중심을 깨닫고 자신의 중심에 하나님의 중심을 담아 자손 대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칭찬을 받는 족속이 되었습니다.

레갑은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지 말라. 항상 텐트에 거하라. 포도주 마시지 마라. 농사 짓지 마라.”그리고는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지 가르쳤습니다. 그 한 사람의 가르침이 오늘날 이스라엘이 완벽하게 복음에서 떠나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던 시절에도 레갑의 자손 요나답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중심을 지켜드리며 햇살처럼 살아냈습니다. 복음을 빛나게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까지 완벽하게 썩어 문들어져버린 한 복판에서 조상 레갑이 남긴 복음의 순결을 지켜내기위해 몸부림치는 저들을 향해 “레갑의 후손들을 보라!” 저들은 조상이 남긴 말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저렇게 목숨을 다했것만 너희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참담하게 외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레갑의 후손을 향해 축복합니다. 저들의 이름이 창대케 되리라! 비록 가난했지만 하나님의 중심이 흘러간 족속입니다.

중심이 주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말씀이 찌르면 돌아섭니다. 휘청거리다가도 오뚝이처럼 주님의 중심으로 섭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된 자의 중심인 것입니다. 세상 풍조에 휘둘리다가도 “주님이시다!”하면 언제든지 툭툭 털고 일어섭니다. 실례 :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해가집니다. 해질 무렵 놀이터에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면 언제 놀랐냐는 듯이 툭툭 털어버리고, 모든 것 버려두고, 엄마 손 잡고 돌아갑니다.

세상 풍조에 휘말려 휘청거리다가도…하나님이 “너 날 사랑하니?” “내가 너의 주인이냐?” 그러면 벌떡 일어나서 “그럼요! 그렇고 말고지요!”라며 손잡고 따라가는 사람. 변화된 사람입니다.

중심이 주님께 건너 온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가운데 있어도 주님을 따릅니다. 레갑의 자손들처럼 주님의 중심을 자기 중심에 심고 묵묵히, 우직하게 따라갑니다.

내면에 진정한 중심의 변화가 일어난 증거가 있습니까?

애매 모호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주 분명합니다. 아주 깨끗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내 삶에 중심이 바뀌었는가? 그것을 점검하는 중요한 것을 나누겠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보여준 바로 그 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수가성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주님과는 바꿀수 없습니다.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이제 주님과 바꿀수 없습니다.

누가 좋은 직장을 준다고 교회를 떠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닙니다!”

실례 : 최춘선 할아버지. 김구 선생님과 독립 운동했던 유공자였습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맨발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자신이 독립유공자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고 신을 벗은 것입니다. 나라가 두 동강난 독립이 어떻게 진정한 독립이냐!고 부끄러워하면서 온전한 해방이 되기 전까지는 주님과 약속을 합니다. 신발을 신지 않겠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약속을 지키겠다고 30년이 넘도록 맨발로 걸어갑니다. 생각해보세요. 서울 영하의 날씨가 얼마나 추워요! 김포에서 목회하실 때 죽을병에서 고쳐주신 아버지께 약속한 복음 맨발로 전하면서 사셨습니다. 중심이 변화된 분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걸음을 걸어갑니다. 미친 사람 취급 당하면서도 갈 길을 갑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맨발로 갑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부흥을 외치며 초고속 성장세를 이루어갔던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아우르면서 맨발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고, 김포에 제일가는 땅 부자였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을 무명으로 도왔습니다. 훗날 할아버지가 목사님을 안 것은 김우현 감독의 다큐멘타리가 나가고부터였습니다.

실례 : ‘기적의 소나무’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발생한 규모 9.0의 강진과 그에 따른 최고 높이 40미터의 쓰나미, 19000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무려 17조엔(약238조원)의 재산피해가 났습니다. 생전에 처음 겪는 대재앙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지난 1년. 그런데 저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는 상징적 존재가 바로‘기적의 소나무’입니다.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 시의 다카타마쓰바라 해안가에 홀로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입니다. 원래 이곳은 500년전에 마을 주민들이 7만여그루의 소나무를 방풍림으로 해안가 1킬로미터에 걸쳐 심어놓은 곳입니다. 이곳은 일본 백경중 하나로 손꼽힐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전 쓰나미로 7만 그루의 소나무가 모조리 뽑혀 나간 것입니다. 오직 이 한그루의 소나무만 기적처럼 살아 남은 것입니다.

최순철목사 - 0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