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7장 1-3절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 산 앞골짜기에 있었더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BC1375년부터 삼손이 죽은 BC 1075년까지 약 300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각 지파들은 제비뽑아 얻은 땅을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 크고 작은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혼란한 시기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어 왕을 세운 BC1043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독특한 전쟁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정복을 당한지 7년이 지나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6:1-2)

미디안 사람들의 핍박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견디다 못해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 고로”(6:7).

백성들이 흘리는 눈물에 하나님 아버지는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울면 됩니다. 자식이 울면 아버지는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그리고 백성을 구원하려고 한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사 기드온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 가장 독특한 전쟁의 주인공으로 부름 받은 기드온은 왜 쓰임받았을까요?

기드온의 제2의 이름

이스라엘의 지도자 기드온을 묘사하는 이름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7:1)

성경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냥 기드온이라고 하지 않고 왜 여룹바알이라고 했을까요? 여룹바알은 언제 붙여진 이름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사기 6:32그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음으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이 성경구절을 통해 할 수 있듯이 기드온에게 붙여진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은 그가 바알의 제단을 헐고도 무사했을뿐 아니라 그 일로 인해 바알의 무력함을 사람들에게 알렸음을 기념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두 개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이름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스스로 만들어가야할 별명입니다. 기드온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여룹바알’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름이었습니다.

이처럼 제2의 이름은 자신이 쌓아온 인격과 삶의 발자취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이름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대한 미디안 과의 일전을 앞두고 두렵고 떠리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때에 자신을 이끄는 지도자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한 것을 기념하는 ‘여룹바알’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얼마나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었을까요!

300 비밀결사대 / 하나님의 두가지 성품

사사기 7:1,2절에보면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 두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성품은 , 하나님은 숫자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7:2)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상대해야할 미디안 군대는 135,000명이었습니다(삿8:10).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기드온에게 군대의 숫자를 줄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 구절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는 절대자 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알 수도, 이해할 수 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준으로 교회를 평가하고, 내 기준으로 성도를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구제를 많이 하느냐, 얼마나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느냐에 따라 교회를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하나님은 숫자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무척이나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충성하는 그 작은 일에 만족하시는데, 우리가 계속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작은 일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분의 마음이 어떨까요?

목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수만 명 모이는 큰 교회의 목회를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작은 인간이 있을 수 있고, 성도 열명을 모아 놓고 목회를 해도 하나님나라의 기드온과 같은 용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에게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중에는 그 내면이 피폐한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풀려서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허수요, 허세요, 허상입니다. 3만 2천이라는 거품을 걷어내고, 300 이라는 핵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두려워 떠는 자는 탈락

사사기 7장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잇는 하나님의 두 번째 성품은 하나님은 현실의 벽에 두려워 떠는 사람과는 일하기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3만 2천명을 300명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검증 절차를 밝으십니다.

첫 번째 탈락 기준은 무엇입니까? “삿7: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하나님의 탈락 기준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랬더니 3/2가 탈락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상황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은 같은지라”(7:12)

자신은 작고 적군은 너무 많은 것입니다. 당연히 두렵고 떨릴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20:1)

영적 시스템의 작동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돌아간자가 2만 2천명이었습니다.

돌아간자와 남아 있는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두려움의 크기가 크고 작은 자의 차이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의 차이는 두루연 상황 가운데서도 영적 시스템이 작동하는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두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영적 시스템이 작동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은 두려움인데, 두려움이 밀려 올때마다 즉각적으로 과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고비의 순간 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게 하셨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힘으로 현실의 두려움과 맞서 싸울 용기를 얻습니다.

반면에 두 번째 사람은 두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영적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은혜를 까맣게 잊어 버리고 두려워 떨며 포기해버립니다.

첫째. 시험을 통해 잘 준비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32,000명 대 300명은 대단한 경쟁율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대단한 300명에게 일을 시키신다. 그런데 그 대단한 사람들에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가?

19-21절을 보라.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 명이 이경 초에 진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시험을 통해 준비된 대단한 군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고작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부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엇 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300명을 선발하셨을까요?

시시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시시한 일도 준비된 사람에게 시키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예수께서 역사하셨던 모든 치유와 기적에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바로 준비된 마음입니다.

준비된 마음에 임하는 역사

1) 빈들에서 일어났던 오병이어의 기적도 아들을 말씀의 자리로 보낸 준비된 어머니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도시락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먹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하루해가 지고 있습니다. 아이는 처음 경험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 앞에 있는 것 만으로도 아이는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왜 이 아이는 도시락을 들고 왔냐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준비된 마음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도중에 돌아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만 하실때까지 그곳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배가 고플때까지 듣고 또 들으라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준비된 마음이었습니다.

2) 블레셋 천하장사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우연히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미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다. 목동은 물매질과 막대기를 잘 던져야 했습니다. 다윗은 잘 던졌습니다. 다윗은 자기 양들을 사나운 짐승들에게 빼앗긴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보다 두 세배나 크고, 수십 배의 힘을 가진 곰의 아가리에서도 자기 양을 구출했습니다. 하나님은 시시한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언제나 시험을 통하고,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둘째. 두려워 떨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3절을 보자.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

하나님 기준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숫자를 보고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떤다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 패배를 시인하는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이미 질것을 확신하고 떨고 있는 오합지졸은 전쟁에서 목숨만 잃을 뿐입니다. 135,000명. 상대가 워낙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까? 135,000대 300명으로 줄어들 때 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되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오직 믿음이 작동되어서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1)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풍랑을 인해 고통을 당했습니다(마14) 이 사건은 오병이어 기적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 그곳에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희열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그곳에서 서둘러 나가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절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기적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대부분 전직이 어부였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을 믿고 풍랑에 대처 했습니다. 풍랑을 만났으나 주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언덕위에서 보고 계셨습니다.

마가복음 648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기서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말씀은 “저희에게 오사”“지나가려고 하시매”입니다.

자신을 알아 볼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이 오시는 주님. 그리고는 그 옆을 지나가시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힘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찾아 주고 알아 봐주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가는 길은 반드시 칠흙같은 어둠이 찾아오고 심신을 지치게 만드는 풍랑같은 고통이 찾아옵니다. 내 힘과 실력을 내려놓을 때 까지 주님은 파도를 더욱 높이십니다. 짐을 더욱 무겁게 올려놓으십니다.왜 그렇게 하실까요? 주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시려고요. 나를 가까이 하고 싶어서요. 두려워말고 주님을 찾으세요. 주님께 맡기세요.

셋째. 300으로 줄여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군사의 수를 300으로 줄이라고 하셨을까요? 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함이니라’(7:2)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경계하십니다.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32,000명으로 미디안을 이길 경우에 자신들의 손으로 승리하였다는 교만에 빠질 것을 아셨습니다.교만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교만하지 않고 오직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내 인생 가운데 32,000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300까지 내리시더니 그 때부터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300이 되기까지 연단하십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자같은 심장을 가질 수 있도록 불같은 시련속에 던져 넣습니다. 우리를 깎으시고 다듬습니다. 부서지고 깨어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300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300의 용사가 되기만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승리를 위해서 움직이십니다. 할렐루야!

<결론적으로>

내 인생에서 모든걸 다 잃어버린다고 해도, 아버지께서 300이면 된다고 하시면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걸 다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하실만한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얻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근거가 없으면…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옷을 찢고 부르짖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를 당신에게로 돌이키소서! 다른 것 다 잃어도! 다른 것 다 끝장이 났어도… 아직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한 희망이 있습니다. 다시 복음 앞에  주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남겨 놓으실 때 … 오직 하나만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 복음만 주셨다 이말입니다.

다른 것 다 없어도 십자가 부활의 복음을 가졌던 우리 초대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충분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부르짖는 기도면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가운데 살지만 우리는 하늘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능력이 있습니다. 그 복음은 거룩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우리를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복음은 모든 소망 없는 죄인들에게…희망과 생명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떠났든지… 우리가 얼마나 깊은 웅덩이에 빠졌든지 상관없이….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있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십자가로 나오라는 말은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내가 죄인인걸 깨닫고 ….나로서는 안되는구나! 주님의 십자가 밖에는 없구나! 나의 존재의 절망을 언제 경험해 보셨습니까? 나 죽어야 예수 삽니다! 내가 죽어야 우리 교회 삽니다!  내가 죽어야 이 민족 삽니다! 십자가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십자가만이 유일한 삶의 이유요 자랑이고…십자가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피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십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고…주님께로 돌아가자! 다시 복음 앞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바로 지금이어야 합니다.

1.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넘지 못할 파도 있것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허덕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인데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 밖에 없어요  나는 그길 갈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가요

2. 참지 못할 분노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참지 못할 슬픔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살아 갈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힘으론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이럴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 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가요

최순철목사 - 03/2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