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장 1-12절

말씀 : 로마전선의 거룩한 불꽃 되어(37) / 본문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아름다운 교회 그 성도들

실례 : 우리 나라에 아름다운 곳이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된 곳입니다. 생물권보전지역으로도 지정되었습니다. 2011년 12월 12일 오전 4시7분(한국 시각) 스위스의 세계문화유적 보호 재단인‘뉴세븐원더스(The New7wonders)’재단으로부터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했습니다. 제주도입니다.

아름다운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집니다. 아름다운 곳은 언제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꾸며진 곳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이 진정 아름다운 곳입니다. 아름다운 곳에는 아픔의 흔적이 있고, 고난의 흔적이 있고, 아름다운 어울림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한결같이 그 한곳에서 세상의 역사를 담아내면서 묵묵히 나이테를 만들어갑니다. 가뭄이 와도 견디고, 모진 비바람이 쳐도 견디고, 눈보라가 쳐도 견디어 냅니다. 땅이 갈라지고 산천초목을 떨게하는 지진의 위협 앞에서도 묵묵히 감당해 냅니다. 제주도와 함께 세계 7대자연경관으로 선정된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는 지진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름다움입니다. 찢어지고, 깨지면서,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서진 가운데서도 묵묵히 위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담아 아래로 흘러가게 했습니다. 그렇게 받아내는 자연스러움속에서 아름다운 여성폭포가 탄생한 것입니다. 깨지고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흩어지지 않은 것은 주변과 함께 더불어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다른 초목들의 뿌리들이 서로를 부둥켜 않고 찢어짐과 깨어짐을 함께 지탱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서로와 함께 어우러져 존재했더니 아름다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선정된 성도들이 나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3-47)

아름다운교회가 되고,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조건들을 갖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 가지만 해내면 된다는 말씀입니다.‘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있어’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같이 하고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서로 다른 은사, 서로 다른 경험, 서로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하며 마음을 하나로 할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을 오늘 말씀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배경

원래 로마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AD30년에서 70년경까지 로마의 핍박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들로 봅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유대교적인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에는 소수의 이방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히려 더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적 배경인 율법주의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로마 교회에서 주도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로마황제 제4대 클라우디우스때 유대인 추방령이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유대인들이 쫓겨나자 이방인 성도들이 로마교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후 추방령이 철회되면서 유대인들이 돌아와 보니까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을 교회 안에서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처방하는 내용이 오늘 말씀입니다. 1-2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여기서 연약한 자는 로마로 다시 돌아온 유대인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성도들을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아무거나 다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별나게 음식을 가리고 채식위주로 먹는 유대인 성도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성도들은 이방인 성도들을 판단했습니다.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별해주셨습니다. 새 중에도, 육축 중에도, 물고기중에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구별된 음식들에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연결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 새롭게 조명되었다는 것입니다.

정한음식을 새롭게 하심

베드로가 욥바의 피장이 집에 있을 때 하늘에서 먹을 수 없는 동물들을 보자기에 싸여 내려오는데 그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같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부정한 것이라고 하며 거절했습니다. 이때 임하신 말씀이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0:15)” 는 말씀입니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외에 음식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한가지 하인의 예를 들면서 비난과 판단을 멈추라고 말씀합니다.

4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하인의 주인은 나다!는 것입니다. 하인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너희가 숫자적으로 많다고 해서 너희 뜻대로 너희를 닮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생활습관중에서도 고쳐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너희들이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냥 함께 맞춰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이런 사소한 것들을 서로 판단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실례 : 왜? 라는 의문을 갖기보다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하고 넘기라는 말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소중한 본질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경계하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씩 다른 기도스타일이 있을수 있습니다. 은혜 받은 표현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찬양하는 모습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를 할 수 도 있고, 통성기도를 할 수 도 있습니다. 손을 들고 찬양할 수도 있고, 일어서서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은혜의 방편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드리면서 함께 어울려 가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입니다.

기존신자들이 빠지는 두 가지 함정

믿음에 대하여 자신이 있고,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앙생활에 회개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4-5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무엇이 축복입니까? 말씀을 들을 때, 내게 찔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회개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예루살렘 백성들은 “마음이 찔려 가로되 우리가 어찌할꼬”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순간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남을 판단하게 되면서 자신을 영적으로 어둠속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판단의식 비판의식은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비교의식은 자신을 상품화합니다.

성도는 상품이 아니라 작품입니다. 성도는 비교의식이 아니라 창조의식을 품어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근성은 우리가 죄인되었을때부터 이미 우리의 기질속에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습관을 빛의 습관으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축복하는 습관, 감사하는 습관, 더불어 받아드리는 습관을 길러내야 합니다.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근성이 얼마나 무섭고 끈질긴 것인지 잘 보여 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35-38절 말씀이다.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성경 밖의 자료에는 이 강도 두 사람의 이름을 디스마스(Dismas) 와 게타스(Getas)라고 전합니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판단 받아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구경꾼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십자가에 함께 달린 두 강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742-43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내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44절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죽음입니까?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는 순간이었고, 지옥의 고통이 범람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지옥의 형벌이 시작된 고통 속에서 조차 강도들은 예수님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판의 기질은 틀림없이 지옥의 기질이고, 마귀의 기질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비판의 기질을 고치는 비결

그렇다면 이런 지옥스러운 비판의 기질을 어떻게 고칠수 있을까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이 십자가에 달린 한편의 강도를 통해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한편의 강도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 2343절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조금 전까지 예수님을 향해 욕을 했던 강도가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가 예수를 향해 비난하는 건너편의 강도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자기의 동료를 꾸짖게 되었고 자신의 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달라졌어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렇습니다”자신을 못박고, 떼리고, 찌른자들을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니 그냥 받아들이시고 묵묵히 감당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의 강도마저 변화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배워야 할 아름다운 인격입니다.

누가복음 2340-42절에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한 편의 강도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비판과 판단을 멈추고, 예수님 바라보았습니다. “예수여!”“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본 것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났더니 동료가 보였습니다. 방금전까지 동료의 모습이 자신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동료를 향해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이 열쇠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열쇠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이 열쇠였습니다.

이런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남의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나 자신은 아름다워질때까지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 지혜로운 성도가 아름다운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실례 : 캘리포니아의 넓은 사막지대에는 두 종류의 새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콘도르라는 남미산 독수리입니다. 이 새는 공중을 날아다니다가 죽은 동물을 찾아 먹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벌새라는 조그마한 새인대 이 새는 사막에 핀 꽃을 찾아 그 꽃의 꿀을 떠 먹으며 살아갑니다.

인생 중에도 사막 가운데서 아름다운 꽃의 꿀을 찾아 맛보는 벌새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콘도르처럼 썩은 동물을 먹이로 연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벌새 같이 매사에 꿀을 찾아 그 맛을 풍기면 다른 꽃들의 더 꽃피우고, 열매를 더 열매 되게 만드는 삶이 진정 아름다운 삶인 것입니다.

최순철목사 - 01/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