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19-20

교회 마다 제자 훈련이 있다. 성경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보여주고, 가르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지식을 전수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대한 확신은 없고, 오직 견해만 있는 사람으로 존재케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확신이다. 제자 훈련은 무엇보다도 ‘확신의 사람’이 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자’라는 개념보다는 ‘군사’라는 개념이 훨씬 더 성경에 가까운 그리스도의 제자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제자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군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일꾼으로 사용하고 있다.

빌립보서 2: 25 에베브로 디도를 향해 함께 군사된 자라고 칭했다.

디모데후서 2:3에서 디모데를 향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빌레몬서 1:2을 보면 빌레몬의 아들로 추정되는 골로새교회의 목회자 아킵보에게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도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기본적인 모습을 ‘군사’라는 이미지로 파악한 것이 명백하다.

실례 : 길을 오다가 보면 군복을 입은 여성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군복을 입은 모습만으로도 씩씩해 보인다. 걸음 걸이부터가 각도가 있다. 그래서 제자 훈련은 ‘영적 군사훈련’으로 바뀌어야 한다.

영적 군사훈련의 핵심

영적 군사훈련의 핵심은 무엇인가?

실례 : 아르키메데스는 말하기를 “나에게 지레와 지렛대를 다오. 그러면 지구라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지레와 지렛대를 쥐어 주는 것이다. 초점을 볼 줄 알고, 중심을 간파할 줄 아는 확신있는 믿음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다.

원래 싸움은 ‘깡’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깡’이 무엇인가? 두려움을 압도아는 ‘일종의 확신’이다. 이런 깡이 있어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실례 : 현대의 정주영회장을 보라. 그는 변변치 않은 학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확신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것이다. 그에게는 불타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이다. 이 불타는 의지 앞에서는 그 어떤 지성도 초라한 것이다. 이 불타는 의지 앞에서 수많은 지성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리더십의 새로운 패러다임

과거에는 훈련의 키워드를 “제자”라는 단어에 두었다. 리더십의 강조점은 거의 ‘정보전달’에 그쳤다. 21세기 리더십은 달라야 한다. 아니 성경적인 리더십의 키워드는 ‘군사’훈련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 리더십의 강조점은 ‘제자 훈련’이 아니라 ‘군사 훈련’이어야 한다.

지성인들을 양산해 낸 결과 오늘날 한국은 요즘 충돌과 논쟁만 일어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지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젊은 지성을 열광시키는 것은 불타는 확신이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흔들 깃발을 제시해 주기만 하면 사람은 변화된다.

교회는 ‘지성’의 흐름이 아니라 ‘영성’의 흐름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지성과 지성이 만나면 논쟁만 하다고 소득없이 상처만 남긴다. 영성을 기초로 한 사람들의 특징은 ‘불타는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리더는 확신을 극대화시키는 사람이다. ‘정보전달형 리더’가 아니라 ‘동기부여형 리더’가 되어야 한다. ‘정보전달형 리더’는 사람들 앞에 서서 공지사항만 전달해주는 사람이다.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리더는 사람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공지사항 조차도 잘 전달되지 않는다.

반면에 ‘동기부여형 리더’는 정보를 전달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들이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결의를 불러 일으킨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잡으면 그렇게 지루 할 수가 없는데,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잡으면 그렇게 재미있고, 흥미로울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그는 동기부여형 리더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동기부여형 리더를 만들어 내는가? “확신”이다. “확신”보다 더 설득력있는 핵심은 없다.

영적 제자훈련의 초점은 명확하다. 모든 훈련과 사역이 확신에 맞추어져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협박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19-20)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만들 것인가? 이것이 군사훈련의 목표이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오직 믿음에 있다(요일5:4).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오직 기도에 있다. 기도의 강골들이 세상을 떨게 한다. 기도의 확신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지할 확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군사들이 만나는 현장은 수시로 변하는 다양한 상황이다. 그곳에서 살아남을 뿐아니라 전사로서 적들이 두려움에 떨게 하려면 ‘람보’같은 강골로 길러내야 한다. 교회는 ‘온실속의 화초’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광야속의 잡초’를 키우는 작업이다.

초대교회 당시 영적 군사들이 많이 필요했듯이, 마지막 시대는 철장권세를 가진 증인들을 길러내야 한다. 믿음의 강골들은 책상에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싸움터에서 길러져야 한다. 그 싸움터가 두 군데 있다. 기도의 현장이고, 전도의 현장이다.

불타는 영성(왕하3:1-11) / 영성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힘’입니다. 영성은 인격을 통해서 담아낼 수 있습니다. 성격은 개인차를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면 아름다운 화음을 들어내는 신령한 공동체로서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품성을 드러내는 신실한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성이 우리들 삶에 구체화되어지기 위해서 다음 네 가지가 요구됩니다.

첫째는 비움입니다. 마음의 비움은 회개로만 가능합니다. 욕심을 지닌 채로는 하늘의 것들을 담을 수 없고, 받을 수 없습니다. 영성은 먼저 비움으로 시작됩니다. 자신만을 볼 줄 아는, 자기 성찰에 있어서 진실한 발견이 있어야 진정한 비움이 가능합니다.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를 알아야 걷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가 볼 수 없는 것들을 가까이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다양한 모양으로 알려 주십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 비추어 줍니다. ‘저 모습이 내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채움입니다. 깨끗하게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비워진 채로 방치되면 더 위험한 것들이 접근합니다. 채움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연료 공급과 같습니다.

셋째는 사랑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거할 때 나도 변하고, 남도 변화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만이 변화됩니다.

넷째는 선교입니다. 선교는 사명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적극적이고 복음적인 행함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운동, 선교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숨쉬기처럼 쉬어야 하고, 당연히 해야만 한다는 의지적인 선언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약속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하늘의 신령한 빛입니다. 따뜻함입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천국의 복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값진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히 채워 주십니다.

최순철목사 - 07/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