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사경회 두번째 말씀 / 진리로 살아라 (요8:32)

두 번째 말씀 / 진리로 살아라

(8: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첫째, 진리는 변하지 않음을 알라.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이것은 양적인 관점에서 사람이 만든 약속일뿐 진리는 아니다. 질적인 관점에서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큰 하나일수 있다. 하지만 말씀을 진리라고 할 때의 진리는 질량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했다. 에덴동산 같은 성도들의 마음에 거짓을 꽂아 넣어서 선악과를 먹게 했다. 여자를 꺾어서 남자를 넘어지게 했다. 비진리를 퍼트렸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부추겼다. 자신을 높이라고 부추겼다.

 

보일 시(示)는 고인돌(T) 위에 제물(-)을 올려놓은 형상(십자가의 제물 되신 어린양 예수를 상징)을 응시하며 두 사람(八)이 예배드리는 모습이다. 금할 금(禁)에서 두 나무는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를 의미하고 그 계시의 뿌리 되신 하나님을 두고 있다.

 

 

둘째, 진리의 속성을 알라는 것이다.

진리는 열정이라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참 진리를 소유한 사람속에는 열정이 꿈틀거린다. 말씀은 성령의 불로 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를 만나면 가슴이 뛰는 것이다. 불이라고 다 가슴을 설레이게하는 것이 아니다. 지옥에도 불이 있다. 그 불은 사람을 태우고 죽게만든다. 어머니가 칼을 들면 좋은데, 강도가 칼을 들면 나쁘다. 누룩도 선용하면 맛을 내고, 변화를 일으키지만, 누룩이 악용되면 부풀리고, 과장하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을 부풀게 한다. 이것은 비진리이다. 그러나 진리의 속성은 겸손의 열정, 낮아짐의 열정을 배우게하고 발휘하게 만든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에 생수의 강(요7:38)이 흘러 넘치게 한다. 강물은 낮은곳으로 흘러간다. 언제나 그렇다. 그래서 생명이 있고, 움직임이 있다. 진리는 언제나 낮은 곳으로 향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참 진리를 맛본 사람은 그 진리를 나누기 위해서 낮은 곳으로 나아간다. 높아지면 자유함이 없다. 높아질수록 불안하고 공포스럽다. 사다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 본적이 있는가? 높아질수록 떨린다. 그러나 마귀는 계속해서 더 높이 올라가라고 부추긴다. 비진리이다.

 

셋째, 진리는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모든 진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응시하게 한다. 진리를 안다고 할 때 ‘안다’는 말은 ‘야다’(ahdah)는‘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맛보면 하나님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 진리(眞理)를 한문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참 진(眞)에 다스릴 리(理)이다. 참 진(眞 )은 ‘변하지 아니하다, 생긴 그대로(창조하신 그대로)’라는 뜻이다. 눈 목(目)은 ‘보다, 주의하여 보다, 응시하다, 눈여겨보다, 말하다’는 뜻이다. 숟가락 시(匙)는 ‘숟가락, 열쇠’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참 진(眞)은 ‘사람이 아래서 천국 열쇠를 주의해서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서 응시하며 다른데 시선을 두지 않는 모습이 바로 진리를 대하는 성도의 자세이다. 진리는 말씀이다. 말씀은 로고스(Logos)인데, 로고스는 언제나 하나님을 응시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생명력을 공급받게 하신다. 비진리는 하나님의 시선을 무시하게 한다. 오히려 인간을 더 의식한다. 인간을 의식하면 할수록 부자유스럽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면 할수록 자유스러워진다. 왜 그럴까? 진리를 알면 알수록 그곳에서 천국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을 소유한자는 죽어도 자유해진다.

 

다스릴 리(理)는 ‘다스리다, 통하다, 재판하다, 옥을 갈다, 처리하다, 손질하다, 구별하다, 다스려지다, 길, 사람이 순행하는 도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님과 통하게 하고, 진리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두게 한다. 진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이것은 사람이 지켜야할 불변의 법칙이다.

 

진리를 알았다면 자유를 맛본 것이다. 이제는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높은 곳에 두지 않는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진리로 인하여 자유케 된다. 사람 앞에서 높아져 봐야 얼마나 높아지겠는가?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사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이삭을 바치리라’는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을 진리로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끝까지 지키는 것을 보시고 수양을 예비하셨다. 아니 미리 예비하셨다. 그리고 그를 믿음의 조상에 들게 하셨다.

 

“인생에 최대의 거짓말은 자신을 높은 곳에 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을 믿는 사람은 넘지 못할 산이 있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음에 자유가 있다. 내면에 자유가 강물처럼 흘러지게 하라.

최순철 - 10/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