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사경회 세번째 말씀 / 부흥이 있으라 (합3:1-2)

세 번째 말씀 / 부흥이 있으라 (3:1-2)

 

3:1-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612년 바벨론이 애굽을 통치하면서 주변 약소국들을 속속들이 점령해갔다. 이스라엘은 606년, 유다는 587년에 각각 무너졌다. 왜 악한 자가 강하여지고 저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운나라, 하나님의 정신에 의해서 통치받는 나라가 삼켜지는 것을 하나님은 지켜만 보고 계실까? 침묵하고 계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 있다. 여기서 ‘살리라’는 히브리 ‘하야’라는 말은 믿음에 뿌리를 둔 살리심이다. 죽은것과 다름없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다시 살려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죽음을 다루실수 있는 분만이 하실수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다.

 

죽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창세기 3장부터이다. ‘선악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나무가 흙과의 관계를 단절하면 죽음이다. 물고기가 물과의 관계를 거절하면 죽음이다.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다. 생명을 만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떨어진 포도주를 구하는 어머니에게 예수께서 이렇게 의문을 던지신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2:4). 여기서 상관이 삶과 죽음의 연결점이다. 이때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대답하고 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2:5). 관계는 말씀을 하시고 듣고하는 것이 살아있는 관계이다. 말씀이 들어오고 그 말씀을 또 흘러 나아가게 해서 다른 이들로 듣게 하는 것이 진정한 관계이다. 귀신도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관계가 없는 지식일뿐이다. 그러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십니까’라고 반문하다가 쫓겨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관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다시 사는 법은 무엇인가? 믿음이다. 믿음으로만 다시 살수 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을 어머니라 하지 않고 아버지라 하는 것은 생명의 씨는 어머니에게 있지 않고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머니라 부를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씨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혼육이 있다. 제 각각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양식이 있다. 육은 씨맺는 채소와 열매들이다. 혼은 문화를 먹고 산다. 에덴에도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영은 다른 양식을 필요로 한다. 말씀이 양식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 즉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4:4).

 

죽음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 히브리말로 ‘무트(죽음) 타(또) 무트(죽음)’이다. 무트의 단어(엠와우타우)에서 ‘멤’은 ‘물’을 의미하고 있다. 물은 언제나 흐름의 운동력을 가지고 있다. 낮은 곳으로의 움직임이다. 항상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물이 흘러가는 곳에는 언제나 생명이 있다. 씨앗들이 열매가 되었다. 그래서 물을 따라 물고기가 모여들고, 어부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물의 목표는 ‘낮은 곳으로 가자’는 것이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은 좌우로부터 일어나는 이 땅의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성도는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좇아가는 존재이다. 이것이 관계 맺은 자의 흐름이다. 내 개인의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앙함으로 믿음으로 관계하면서 사는 존재이다(골3:1).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고(히11:6) 달려가는 것이 믿음으로 자신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최고의 상급은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께서 ‘나의 신랑’이 되신다. 이것은 절대적인 관계이다. 죽어도 변하지 않는 위대한 관계이다.

 

에스겔37장에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날 때 성령이 생기로 불어왔다. 선지자의 선포와 외침으로 시작된 말씀이었다. 말씀이 육신을 살리는 역사였다. 마른 뼈들이 스스로를 살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위로부터 불어오는 성령이 바로 ‘루아흐’였다. 죽은자는 무게를 느끼지 못하지만, 산자만이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최순철 - 10/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