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1-12

제목 / 실로암, 그 우물에 비친 얼굴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좋은만남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좋은 만남입니다. 좋은 만남에는 사람을 얻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만남을 원합니다. 성경은 누구나 사람을 얻는 좋은 만남을 가질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전 9장 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좋은 만남은 가꾸어지는 것입니다.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얻는 곳입니다. 좋은 만남의 장이 되어 주는 곳입니다. 또 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로암과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보내어 주고 싶은 곳입니다. 주님께서 믿고 사람을 보낼만한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실로암은 주님의 말씀이 연결된 곳입니다. 실로암은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를 비추어주는 곳이었습니다. 실로암은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케 하고, 미래를 소망차게 만들어주는 곳입니다.
오늘은 실로암, 그 우물에 비친 얼굴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얻는 소망의 이야기가 교회와 가정의 이야기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좋은 만남을 가꾸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만났습니다. 그 소경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고 밝은 눈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삶은 고통이었습니다. 고통위에 또 곁쳐진 고통속에서 살았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죄인 취급까지 했던 것입니다. 소경들은 언제나 판단받아야 하는 위치에서 살았습니다. “자기 죄 때문일까? 부모 죄때문일까? ”
그런데 이 때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한 번도 듣지 않았던 소리였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
설마? 자기처럼 천한 죄인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사용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습니다. 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소경의 가슴은 뛰고 또 뛰었습니다. ‘도대체 나같은 것을 통하여 나타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6절).

주님께서는 어떤 주님이십니까?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때 “잠잠 하라” 꾸짖으심으로 살렸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거만,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명령하셨습니다. 문둥병자 위에 손을 얹은즉 나음을 입었고, 일어나라 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지금 “소경아, 눈을 떠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왜 구태여 손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셨을까요? 왜 즉석에서 고치실 수 있으신 주님에 이처럼 시간과 힘과 정성을 쏟고 계실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소경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꾸고 계셨던 것입니다.
소경은 주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다만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진흙을 이기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마침내 주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체온도 느껴집니다. 주님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따스한 주님의 체온이 소경의 몸에 스며듭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준비되었다”라는 희망을 주셨던 그 음성으로 “이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소경의 영혼이 진동했습니다. 주님의 인격과 소경의 인격이 만나는 순간 뜨거운 불꽃을 튀기고 있습니다. 소경은 두말없이 실로암으로 향합니다.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전폭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눈을 떴습니다. 새로운 인격의 눈이 열렸습니다. 12절에 보면 소경의 새로운 모습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면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8-9절)

사람들은 새로운 인격,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소경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과거와 현재가 달랐습니다. 하나님과 만남에는 이런 변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맞다, 아니다 하며 다투는 모습을 보며 “내가 그로다”대답합니다. 소경은 눈만 뜬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깨끗하게 열렸던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둘째. 부족함을 덮어주어라.
그런데 왜 주님이 침으로 진흙을 이게시고 눈에 발랐을까요? 앞 못 보는 소경인데 거기다 진흙까지 발랐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소경인 것을 덮어줌으로 보았습니다. 덮어줌은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갈멜산 정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마른 영혼에 물을 붙다.
갈멜산에서 850인의 바알추종자들과 엘리야가 불로써 제단을 태우는 싸움을 할 때가 기억나십니까? 바알 추종자들이 하루 종일 불을 내려달라 외쳤지만 불은 없었습니다. 저녁 해 질 무렵이 되어 엘리야가 나섰습니다.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왕상 18:33-38)

성령의 불은 촉촉한 가슴에 불을 줍니다. 은혜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 진흙을 눈에 바르게 되면 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덮어줌으로 보여졌습니다. 소경을 더 소경되게 한 것입니다. 마치 소경이 자기가 소경인 것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경이면서도 진흙으로 눈을 덮어 더듬거리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간 사람은 눈을 뜨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절).

그들이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실로암으로 갈 수 있었을텐데, 자기들은 본다고 하니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지각이 새로워져서 새로운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을 통하여 진정으로 진리를 보기 원하는 자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리를 보려면 먼저 내 자신이 소경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경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있는 자라면 입에 제갈을 물리고, 마음이 상한 사람은 아프다고 말해야 합니다. 돈에 약한 자는 돈을 이마에 붙이고 돈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음을 신음해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것처럼 꾸미지 말고 내가 아프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 병이 다른 것을 병들게 합니다.

셋째로, 실로암이 되어 주라
실로암 못은 어떤 곳입니까? 실로암 못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루살렘 동문 밖 기드론 골짜기에 기혼이라는 샘이 있었습니다. 이 곳으로부터 수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이 마지막으로 고인 곳이 바로 실로암이었습니다. 물은 절대로 높은 곳에 고이는 법이 없습니다. 흘러내리는 물은 반드시 가장 낮은 곳에서 고입니다. 실로암 못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눈을 씻는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눈을 씻을 도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나와 함게 계시는데도 그 주님을 느낄 수 없다면, 나 자신이야말로 영적 소경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실로암으로 가라”“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
우리가 진정 소경된 삶을 청산하기 원한다면 내 삶에 가장 낮은 곳 실로암으로 향해 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실로암보다 훨씬 낮은 곳,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실로암보다 더 낮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어요. 높은 마음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로암으로 내려간다는 것, 낮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남을 섬기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밝은 눈으로 우리를 섬기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섬기는 자의 마음에 우물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의 얼굴을 비추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로암의 의미였습니다. 내 가슴에 담긴 내 이웃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맑게 개임인가요? 흐림인가요? 밝음인가요? 어두움인가요? 웃음인가요? 슬픔인가요?

실례 : 1949년 프랑스 아베 피에르 신부가 조르주 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조르주는 40대 살인범이었습니다. 조르주는 피에른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만약 도와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피에르 신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살할 자유라도 있지만, 나는 자살할 권리도 없소. 자살할 용기로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 주시오.” 피에르 신부는 섬김을 받으러 온 조르주를 오히려 섬기는 사람, 실로암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조르주의 삶은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실의에 빠져 있었던 조르주가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사람을 구해 낼 정도로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 그 유명한 ‘엠마우스’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현재 이 운동은 37개 국에 350개 공동체를 이루어 수많은 소경된 자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피에를 신부는 엠마우스 운동의 세 원칙을 ‘일한다, 나눈다, 베푼다’로 확정하였습니다.

실례 : 홍반식 박사의 “효과적인 판매 대인술”이라는 강의에서 “10. 10. 10 원리”를 강조합니다. 이 원리는 “10분간 공들여 확보한 고객을 놓치는 데는 10초면 충분하며 발길을 끊는 고객을 다시 되돌리려면 10년이 걸린다”는 뜻이다.

최순철목사 - 11/3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