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6:1-7

제목 / 금식,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본문 / 열왕기하 6:1-7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3 그 하나가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도 종들과 함게 하소서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가리라 하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대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실례 : 벌목장에 한 젊은 벌목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노인 베테랑 벌목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젊은 벌목꾼이 노인에게 찾아와서는 대결해서 최고의 벌목꾼을 가리자고 했습니다. 방법은 해뜨고 부터 해지기까지 가능한 한 많은 나무를 쓰러뜨리는자가 승자가 되는 거죠! 노인은 결투를 받아드렸습니다. 젊은이는 우람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오랜 기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 같은 시간에 출발했습니다. 젊은이는 시작과 함께 나무를 쓰러뜨려갔습니다. 멈추지않고 넘어 뜨려 갔습니다. 휴식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노인도 조금 느린 듯 했지만 한 그루 한 그루 벌목을 해 갔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젊은이와는 달랐습니다. 도끼로 나무를 내려 칠때마다 뭔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 그루를 잘라 낸 다음에는 15분정도를 쉬었습니다. 젊은이는 결코 쉬지 않았습니다. 노인보다도 훨씬 많은 나무들을 쓰러뜨려 갔습니다.
하루 해가 졌습니다. 일하던 손을 멈추었습니다. 서로가 쓰러뜨린 나무를 세어 보았더니 노인이 더 많은 나무를 벌목한 것입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가르침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가지가 달랐습니다.

첫째는 나무와의 소통이었습니다. 노인은 도끼질을 하는 내내 나무와 소통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렇게 잘 자라 주어서 고맙다. 그동안 이 자리를 지켜느라 수고했다. 네가 있어서 큰 바람을 견딜 수 있어어! 이제는 내가 너를 의자로 만들거야! 네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게 될거야! 너를 식탁으로 만들거야! 행복한 가족들이 네 위에 음식을 차려 놓고 맛있는 식사시간을 갖게 될거야! 너를 이제 이런 외딴 산중에 버려 두지 않을거야! 너를 아껴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의 가정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게 할꺼야!”두런 두런 나무을 하면서 일을 했기에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쉼과 날 세움이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도끼의 날을 갈았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쉼없이 도끼질을 했기 때문에 날은 무디어졌고, 힘은 더 들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베어 낼 때마다 처음과 같은 날선 도끼로 쳐 냈기에 쉽게 잘라 낼 수 있었습니다. 나무 입장에서도 덜 얻어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노인 앞에서 나무들은 자신들을 쉽게 넘어뜨려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많은 사람들이 무디어진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날까로움을 잃어버렸습니다.
벌목꾼만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뎌지고 있습니다. 찬양을 하고 있지만 거기에 날카로움이 없습니다. 손을 들고는 있지만, 박수를 치고는 있지만 날카로움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고는 있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날카로움이 없습니다. 초점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름부음이 없습니다. 날선 검이 없습니다. 조용히 베어내는 날카로움을 잃어버리면 거칠고 투박한 소리들이 부딛쳐 옵니다. 찢어짐과 상처들을 주고 받습니다. 건강한 소통을 위해 기꺼이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카로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판에 박힌 의식과 봉사는 일상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의자처럼 쉼이 없습니다. 식탁처럼 나눔이 없습니다. 침대처럼 평안함이 없습니다. 복음의 날이 서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검으로서 좌우에 날 선 검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날을 서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방법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입니다.
이사야 58장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으로 날을 서게 하라
결박을 풀고, 줄을 끌러주며, 멍에를 꺾어내는 날이 선 성령의 검을 지니려면 금식을 통해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금식은 죄로 무디어진 영혼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느9:1-2).
금식은 우리에게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열정을 되살려 냅니다. 무디어진 날로는 나무를 자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힘들어하는 이유는 날이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날을 다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제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그 하나가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가리라 하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대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쇠도끼를 낚시질 하는 엘리사. 나뭇가지로 쇠도끼를 건져 올리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진실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자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처소를 확장하려 했습니다. 그는 선지자의 교육을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소명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끼 머리가 튕겨져 물속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쇠는 물에서 뜨지 않습니다. 곤란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아주 심각한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주인에게 돌려준다고 약속하고 빌려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디 근처에서 잊어버렸는지는 알지만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 사람에게 이런 상황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에게 상황을 진실로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한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뭔가를 하다가 그만 나의 실수로 다른 사람의 것까지 잃어버리게 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넘어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소중한 것을 잃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헌신을 물거품이 되게 만들어요. 다른 성도의 마음속에 열정에 식어지게 만들어요. 나 때문에 누군가가 침체에 빠집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날카로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선지생도는 왜 도끼를 잃어버렸습니까? 그것은 날카로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날카로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 때는 영적인 것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향한 불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한 때는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삶에서 고단한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면 편안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엔가 도끼날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빈 나무 몽둥이만 들고 나무를 자를려고 두들겨 댑니다. 내 손만 아픕니다. 몇 번 휘두르다가 그만 둬 버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일꾼들이 현주소입니다. 날카로움이 사리지고 무디어짐이 가득합니다. 도끼 날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것은 아예 없고 남의 것조차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날카로움이 사라졌습니다. 도끼 날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단은 찾아와서 속삭입니다. “이제 네 인생은 끝났다! 영원히 도끼를 찾을 수 없어? 네 은사는 끝났다. 너는 더 이상 은혜를 받을 수 없어! 네 기도는 응답되지 않아! 효력이 없어! 하나님은 네 음성을 듣지 않아!”좌절케 만듭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도끼 날을 잃어버린 생도 곁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말했더니 그가 쇠도끼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몰랐던 그 비밀을 하나님의 사람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를 베어 물어 던지는”법이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영적인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쇠도끼라 할지라도 물위에서 떠오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디어진 도끼날을 날선 검처럼 예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이번 21일동안의 금식 기도를 통해여 우리의 삶의 날카로움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름 부으심, 하나님의 크심이 나타날 것입니다. 찬양의 열정이 살아날 것입니다. 기도의 불이 활활 불어 올 것입니다. 잃어버린 쇠도끼를 찾아 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은 날카로움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열정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 몰라서 그래요. 나는 실패했습니다. 도덕적으로 무너졌습니다. 내 인격은 이미 거칠어 질대로 거칠어 졌습니다. 성품은 비뚤어질대로 비뚤어졌습니다. 구제 불능상태입니다. 알콜 중독입니다. 마약 중독입니다. 포르노그라피에 빠졌습니다. 게임중독에 빠졌습니다! 도저히 회복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포기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우리가 넘어졌다고 해도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마라톤을 하던 선수가 뛰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다고 해서 심판이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서 계속 달려가라고 말합니다. 100미터 달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뛰지 않아요! 넘어진 그 자리에서 오늘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시 달려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다니엘 21일 금식은 여러분의 날카로움을 되찾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날카로움을 회복하는 순간 내 주위의 사람들의 삶에 희망을 쏘게 됩니다.
사업을 하다가 날카로움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금식하십시오. 물질을 다룰 수 있는 날카로움이 살아납니다. 자녀를 키우다가 날카로움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금식하십시오. 자녀들의 삶에 날카로움 살아 날 것입니다. 사명과 사역에 날카로움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날카로움을 잃어버리셨습니까? 그래서 소통하는데 두려움이 있습니까? 금식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의 영성이 금식을 통해서 살아 날 것입니다.
결혼생활에서 날카로움을 잃었습니까? 하나님과의 영적인 동행에서 날카로움을 잃었습니까? 이 21일 간의 금식을 통해서 도끼날을 갈게 될 것입니다.

고백해야 날카로워 짐
날카로움을 되찾기 위해서는 해야 할 두 번째는 고백입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무엇이 나를 무디게 만들었는지 그것을 분명히 알고 고백할 때 날이 서게 됩니다.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십시오.
너무나 많은 크리스찬들이 그것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도끼날이 무디어진 것을 감추고 날선것처럼 휘두르면 휘두른 만큼 자신만 아픕니다. 그리고 그 휘두름으로 다른 사람의 도끼마저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날카로움을 잃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날카로움이 아직 남아 있는 척 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속일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날카로움을 잃어버리면 가장 먼저 열정이 사라집니다.
열정에 대하여 여러분이 아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열정은 전달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열정이 있으면 그 열정이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자녀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날카로움을 잃게 되면 열정이 사라지게 되고 다른 사람의 열정까지도 식어지게 만듭니다.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뭇가지를 만난 것입니다. 도끼를 떠오르게 하는 나뭇가지 말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찾게 해준 것은 나뭇가지였습니다. 마라의 쓴물을 달게 했던 그 나뭇가지였습니다. 무디어진 날을 날카롭게 만들어 준 것은 나뭇가지였습니다. 나뭇가지는 십자가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왼 인류의 인생을 마이너스가 되게 만들어버렸던 죄와 사망의 결박을 깨뜨리고 부활의 영광을 가져왔던 바로 그 나뭇가지입니다. 귀신의 결박도 풀게 하시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내 십자가 되는 길은 바로 금식과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금식과 기도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귀신 들린 아이를 두고 한참을 씨름했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자 예수님께 대려왔습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쫓아내셨습니다. “막9:25절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들어가지 말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절). 그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프로쉬케(기도) 카이(와) 네스테이아(금식) 원문에는 금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더 중요한 지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유가”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런 유가라는 말은 ‘투토 토 게노스’로서 ‘게노스’는 ‘혈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혈통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하는 기도와 금식이 능력으로 나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28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도행전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금식은 주를 섬기는 태도입니다. 금식을 할 때 그 모습 그대로가 주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금식을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금식을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건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금식은 우리를 깨드려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으로 만지실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수 있게 만듭니다. 영적인 일에 민감해지게 만듭니다.
금식하면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지고, 성령의 능력에 민감하게 됩니다.
금식에는 간절함이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자가 만납니다. 간절하지 않으면 놓치게 될 것들이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혜택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고 저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친밀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의 최고의 상급입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진심을 표현합니다. 금식은 성도의 인격을 세우는 몸부림입니다.
금식은 우리를 연단하여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속 사람이 강건하여 음식을 절제할 수 있게 되면 정욕을 절제하고 탐욕을 절제하고 음란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이 훈련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기고 또 필요로 하는 음식을 절제할 수 있게 되면 더 빨리 하나님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 빨리 주목하십니다.

최순철목사 - 12/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