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1-10절 말씀

말씀 :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1) / 기울게 할 것인가? 세울 것인가?
본문 : 마태복음 18:6-10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오늘날 성도들은 열정은 있지만 영적 각성은 부족하고, 잠재력은 있으나 정체성이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성도들 안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능성을 어떻게 흔들어 깨우느냐 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잠재력을 깨우기 위해서는 가나안땅을 먼저 차지했었던 족속들이 가지고 있던 쓰디쓴 뿌리들을 뽑아내기위해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져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저마다 뿌리깊게 굳어진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담을 높여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담을 허물어주고 다리를 놓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짐이 되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무엇이 좋은 삶인지 쉽게 분별할 수는 있습니다. 다리를 놓아가는 사람, 힘이 되어 주는 사람, 기도를 해 주는 사람이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앞으로 몇 주동안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가 기대하기는 이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잠재력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걸림돌이었던 모난 부분이 있었다면 그 부분이 디딤돌이 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 속에서 걸림돌이 되었던 사람들 곁에서 디딤돌이 되어 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보기를 원합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 중에는 원수에 사로잡혀서 사람들을 기울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을 기울게 하고, 교회를 기울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국가를 기울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울어져가는 그곳에 늘 함께 하셨습니다. 디딤돌같은 사람들을 보내셔서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바로 세워갔습니다. 더욱더 튼튼히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위에 세워가셨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기울게 할 것인가? 세울 것인가?”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디딤돌이 되어가려면 먼저 걸림돌이 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절). 설명이 필요한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족’이라는 단어이고, 하나는 ‘연자 맷돌’이라는 단어입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스켄달리조’(Skandalizo)로 ‘걸려 넘어지다, 함정에 들다, 불쾌하게 하다, 죄를 범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원래는 ‘캄푸토’(Kampto)에서 왔는데, ‘굽히다, 절하다’(롬11:4)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할 수 없이 숙이는, 억지로 절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속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연자 멧돌’이란‘뮐로스 오니코스’(mulos onikos)로서 직역하면 ‘당나귀의 맷돌’을 말합니다. 즉 당나귀가 돌리는 대형 맷돌입니다. 지금이 약1.5미터로 무게는 1톤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돌을 목에 자신의 목에 매다는 것이 바로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타인의 영을 피폐케 하며 자신의 영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것인지 경고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8~9절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연자맷돌의 비유”속에서 사람을 세우는 디딤돌이 되는 비결을 감추두셨습니다.
우선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는 제자들 간에 “누가 더 크냐”하는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논쟁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걸려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급기야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답을 구했습니다. “누가 천국에서 제일 큰지요?”하고 물었습니다.
항상 인간이 사는 곳에는 이 문제가 발생합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누가 크냐?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크니이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1:25절에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천국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숨겨졌으나 어린아이같은 자에겐 알려진다는 이상한 말씀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린 아이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여기서 ‘어린아이’ 란 말에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 조건은 ‘악에 대하여’ 라고 명시합니다. ‘악(惡)’ 에 대하여 어린 아이처럼 되고, ‘지혜’ 에 대하여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의미는 악에 대하여 ‘순수함’ 이 아니라 ‘무지(無知)’ 를 나타내는 것이고, 반면 장성한 사람은 ‘현명한 사람’ 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악을 알아버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을 버려야 합니다. 악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악을 이기고 정복해야 합니다.

악을 이기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합니다. 베드로전서3:8-12“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왜 악을 버려야 하며 싸워 이겨야만 할까요?
단12:10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악에게 지배를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 을 <악한 자>라고 규정합니다. 반면에 지혜는 ‘말씀을 깨닫는 자’ 가 바로 <지혜 있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하셨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어린아이 같은 자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성품을 가진 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악을 이겨낼 수 있는 엄청난 힘의 항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악이 아무리 위협해도 좀처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방긋 방긋 웃습니다. 건드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어린아이처럼 악에게 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겨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사람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욥이 어린아이같은 사람입니다. 온갖 시련과 역경이 쓰나미처럼 닥쳤습니다. 그의 소유를 빼앗가 갔습니다. 재산을 기울게 했습니다. 남편을 버리고 아내가 떠났습니다. 가정이 기울었습니다. 몸에는 악창이 돋았습니다. 욥 개인의 인생이 완전히 기울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악에게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하는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욥기 42장 1-6절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1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친구들이 하는 말들에 의해서 욥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으로는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힘겨운 영적전쟁이었지만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일이기에 기꺼이 싸워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이김의 비결은 ‘자신의 회개’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였을 때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케 하는 선지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실례 : 하와이 코나에서 열방대학에 다닐 때였습니다. 그때 출석했던 미국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는 남태평양 해변의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서 바람이 많았습니다. 몇 주가 되었을 무렵 여기저기 교회를 살피다가 우연히 보게 된 특이한 건물이 있었습니다. 백년이 넘은 교회 초기에 세워진 아주 낡고 오래된 교회당이었습니다. 교회당은 세월을 담고 힘겹게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편 쪽으로 가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개의 기둥들이 기울어지는 건물을 받쳐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교회당이 이렇게 기울어진 것은 그동안 강한 바람과 폭풍을 견디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허리케인과 토네이도가 지나가도 버텨냈답니다. 남태평양의 뜨거운 햇살도 견뎌 냈습니다. 온갖 병충해들을 막아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길러졌고, 영혼들이 구원받았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선진들이 은혜를 사모했던 곳이었고, 찬양하며 예배드렸던 교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울어져 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기둥을 받쳐 놓은 것입니다.

우리도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에 불어왔던 수많은 시련의 바람 때문입니다. 저도 목회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겨웠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만하고 기울어져버리자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밤잠을 설쳤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기울어짐을 멈추고 세워져가고 있는 저를 보게 된 것입니다. 마치 기울어져가는 교회를 여러 개의 기둥들이 바쳐서 세워준 것처럼 저를 바쳐주시는 기둥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기우는 쪽을 받들어 세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최순철목사 - 01/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