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3:13-27

실례 : 기록36.5도‘장인의 손’이라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홀로 외롭게 장인정신을 이어가는 분들을 소개합니다. 맷돌을 만드는 장인, 화문석을 짜는 장인, 화살 전통을 만드는 장인, 평생을 베틀에 앉아 수를 놓는 장인, 목판에 조각을 새기는 장인. 한국의 장인들 대부분은 80을 넘기신 분들이었습니다. 장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대를 이을 제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장인의 뒤를 이어 가는 제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충북 청원군 오송읍 봉산리. 7대째 정통방식으로 옹기를 빚고 있는 옹기장인 박재만(81세) 옹.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200년 된 가마로 지금도 옹기를 빚습니다. 그분에게는 옹기전수자가 있습니다. 아들 박성일(50세) 씨입니다. 아들에게 기자가 묻습니다.‘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이 길을 가고자 결심하게 된 이유가 있는지요?’‘장인이신 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지켜 오신 좋은 문화유산을 후손으로서 이어가는 것이 도리라’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이어가야할 도리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기자가 장인 박재만 옹에게 여쭈었습니다.‘장인이란 무엇일까요?’“나에게 장인이란? 약속과 책임감이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길이지만, 아무도 하려하지 않지만 장인의 아들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약속과 책임감으로 일생을 살아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장인의 정신을 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느헤미야와 함께 성벽재건의 역사를 도왔던 39명의 이름들 앞에 26명의 아버지들이 나옵니다. 아버지들이 성 역사에 참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 앞에 그 아버지의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성경에 남긴 아들

이므리(하나님은 약속하셨다)의 아들 삭굴(2절), 우리아(여호와는 빛이시다)의 아들 므레못(4절), 베레갸(여호와께서 복주신다)의 아들 므술람(4절), 바아나(낙타를 타는 자)의 아들 사독(4절). 바세아(절름발이)의 아들 요야다, 브소드야(여호와의 비밀을 아는 자)의 아들 므술람(6절). 할해야(여호와는 보호하시다)의 아들 웃시엘(8절), 후르(고귀함, 빛남)의 아들 르바야(9절). 하루맙(코가 째어진)의 아들 여다야(10절), 하림의 아들 말기야, 바핫모압(모압의 통치자)의 아들 핫숩(11절). 할로헷스(속삭이는자)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12절), 레갑(여호와는 관대하시다)의 아들 말기야(14절). 아스북(함께 황폐된)의 아들 느헤미야(16절), 바니의 아들 르훔(17절), 헤나닷(하닷(우뢰의 신)의 은혜)의 아들 바왜(18절). 예수아(여호와의 구원)의 아들 에셀(19절), 삽배(하나님이 주셨다)의 아들 바룩(20절), 우리야(여호와는 빛이시다)의 아들 므레못(21절), 마아세야(여호와의 역사, 일/ 대상15:8)의 아들 아사랴(23절), 헤나닷(하닷의 은혜)의 아들 빈누이(24절), 우새(여호와께서 들으셨다)의 아들 발랄(25절). 바로스(여호와께서 속량하셨다)의 아들 브다야(25절), 임멜(어린양)의 아들 사독(29절), 스가냐(여호와가 거하심)의 아들 스마야(29절). 셀레먀(여호와에게 복을 받음)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뜻 없는 이름 이스라엘 인, 상처?)의 여섯 째 아들 하눈(30절), 베레갸(여호와께서 복주신다)의 아들 므술람(30절). 이상 26명의 아버지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두 번씩 반복되어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아들의 아버지일 것 같지 않은 아버지들이 나옵니다. 진리는 한 사람의 이름 속에도 복음의 원리를 담아주셨습니다. 이분들의 이름을 통해서 조명하는 복음의 비밀이 깨달아질 때 우리가 누려야할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버지 우리아와 아들 므레못입니다(4절과 21).

4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21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므레못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올려놓습니다. 할아버지 학고스는‘가시나무’라는 뜻입니다.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 다윗의 때‘7번째 반차를 따라 사역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버지 우리아는‘여호와는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우리아는 아들 므레못의 삶에‘여호와의 빛’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이름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학고스는‘가시나무’라고 했습니다. 가시나무는 십자가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12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십자가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다리입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하란으로 떠났던 야곱은 광야에서 사닥다리 위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인자를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벧엘의 돌제단을 세웠습니다. 예배의 중심을 세웠습니다. 성도의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중심에 십자가의 신앙이 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 가운데서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 바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기름이 타면서 빛을 발하듯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갈라디아서 516-23절 말씀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의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사는 것을 좇아 합니다.

실례 : 모세에게 광야 40년 생활은 가시나무의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온유함이 승하고 성령의 감동을 입었기에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던 모세는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7년을 수일처럼 지냈다고 고백했습니다.

할아버지 학고스는 가시나무 십지가를 짊어진 거룩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거룩한 예배자였습니다. 성도는 가시나무 같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더욱 여호와의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므레못의 아버지 우리아는 ‘여호와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 가운데서 므레못은 ‘높은 하늘의 세계’를 바라 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버지 베레갸와 아들 므술람입니다.

아버지 베레갸는‘여호와께서 복주시다’는 뜻입니다. 므레못은‘보상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었던 오벧에돔이 하나님이 그의 소유된 모든 것 위에 복을 주셨습니다. 왜 복을 받았습니까? 언약궤를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법궤 뚜껑인 속죄소를 열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소달구지에 실고 가다가 넘어지는 법궤를 붙잡다가 죽은 웃사도 있습니다. 법궤가 놓였던 곳에 우상이 있으면 우상들의 목이 부러졌습니다. 법궤가 블레셋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가는 곳마다 죄인들의 몸에 악한 종기들이 돋았습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법궤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법궤를 잘 모시는 것일까요? 법궤의 핵심은 그 속에 담긴 세 가지 물건과, 그것을 덮고 있는 덮개에 있습니다. 이 덮개를 속죄소라고 부릅니다(출25장). 세 가지 물건은 인간의 죄를 상징합니다. 죄를 법궤 속에 넣고 덮었습니다. 속죄소로 덮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뿌려서 속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뚜껑을 열면 죽음이었습니다. 만지기만 해도 죽음이었습니다. 반대로 법궤를 지킴으로 복을 받는다는 말씀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복을 받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삼아 죽으심과 같이 우리도 예배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중에 가장 복음적인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모리앗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결국은 순종합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던 그 순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번제물로 자신을 바친 아들이삭은 하는 일마다 복을 받았습니다. 우물을 파면 파는 곳마다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백배의 복을 받았습니다. 26:24-25“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셋째로, 아버지의 본이 되신 분들이었습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1) 여다야의 아버지 하루맙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분은 코가 째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에 흉한 장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여다야라는 아들이 자랐습니다. 여다야는‘여호와의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2) 요야다의 아버지 바세아입니다. 바세아는‘절름발이’라는 뜻입니다. 지체에 장애를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보다도 훨씬 불리한 형편 속에서 세상을 절름거리며 살았습니다. 그런 아들이 요야다였습니다. 요야다의 뜻은‘여호와께서 아신다’입니다.

3) 하눈의 아버지 살랍입니다. 살랍은‘상처’를 뜻합니다.

 

코가 째어진 아버지, 절름발이 아버지, 상처로 얼룩진 아버지. 주위의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살아왔지만 저들의 아들들은 참으로‘여호와의 찬송이심’‘여다야’로 키웠습니다.‘여호와의 인자하심’‘요야다’로 키웠습니다.‘여호와는 은혜로우신’‘하눈’으로 키워냈다는 것입니다.

코가 깨어져 얼굴은 일그러져 보였지만 마음은 여호와의 찬송으로 가득했습니다. 뭐가 그리 행복한지 찬송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세상을 절룩거리며 흔들리며 살았지만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인자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살람 자신은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인생이었지만 이 상처가 아들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낸 아버지였습니다. 오히려 여호와는 은혜로우신 분임을 드러냈습니다.

자신들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전혀 없는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들은 참으로 내 아버지가 최고였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으셨습니다.

이사야 53: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찬미예수 1500 / 701장 그가 찔림은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각기 제 길로 갔거늘 /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다시켰도다

 

하나님 아버지 내 아버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우리들의 과거는 대부분 죄가운데서 넘어지고 흔들리고 부끄러운 시간들로 얼룩진 인생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거듭난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연약하여 육체의 욕심을 좇아 성령의 감동하심을 무시했던 순간도 있습니다. 사단은 오늘도 정죄할 것입니다. “너는 아니야!, 넌 용서 받을 수 없어!”설령 나조차 나를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넘어졌어도 그 넘어진 죄의 현실보다 더 큰 건, 날 사랑하사 십자가 져주신 주님의 십자가가 더 큰 결론입니다. 나는 주님에게 신실하지 못한 때가 있었어도 주님은 신실하셨어요. 나는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했던 약속을 어긴 때가 많았지만, 주님은 나에게 한 약속을 단 한 구절도 어긴 적이 없으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제 우리는 내가 감히 나의 나 된 것을 말하라면 주님의 은혜 밖에 없어요! 주님 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합니다.

최순철목사 - 0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