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4:7-14

실례 : 911 테러를 당할 당시 세계무역센타 부총제가 한국인이었습니다. 직원 중에 한 자매가 있었는데, 몸은 둔하고, 머리는 나쁘고, 일은 더디고, 실수가 잦아서 언제 그만두게 할까 고민이 되는 자매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잡지 표지 사진에 바로 그 자매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한 할머니를 구해 나오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기자가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전 몇 분의 상황을 물었습니다.“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자 사람들은 비상구 계단타고 내려왔습니다. 한사람도 넘어지거나 밟혀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품에 안겨졌고, 노약자는 젊은이들의 품에 품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손은 앞사람의 어깨위에, 한손은 옆 사람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소리에 맞추어 밀침도 없이, 넘어짐도 없이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소리요? “one two! one two! 하나 둘 하나 둘!”극도의 공포감이 밀려오고 생명이 위협 당하는 순간조차 본능적으로“하나 둘 하나 둘!”질서를 지켜내는 사람들! 어린 시절 부터 배워온 질서정신이었습니다. 뼈 속까지 질서의 기본 정신이 젖어 있었기에 그 질서가 사람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깨달았다는 부총제의 말입니다.“미국인의 질서 정신을 뛰어넘지 않는 한 중국은 결코 미국 아래 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는 성벽재건의 뼈대가 세워졌습니다. 일곱 개의 문과 네 개의 망대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성벽이 올라갔습니다. 울타리 안 백성들에게는 희망과 기쁨이 차오르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서 방해하는 무리들에게는 절망과 분노가 치솟는 혼란의 현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은 그저 수많은 성중에 또 하나의 성이 세워지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성벽이 완성되는 전 과정을 통해서 교회를 지키시며, 가정을 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생겨도 방해하는 무리들조차 품고 그들마저 하나님의 일에 함께 빠져들도록… 함께 이기는 자가 되게 하는 놀라운 전략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방해요소

북으로는 사마리아 군대가, 동으로는 암몬 사람들, 남으로는 아바리아인들이, 서로는 아스돗 사람들이 푀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이런 현실가운데 처하게 되면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걱정이 일어납니다. 당연한 감정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말씀의 질서를 따라 하나 둘 하나 둘 하라고 도전합니다. 고후4:6“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가겠습니다. 왜 저들은 하나님의 일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일까? 저들은 왜 하나님의 일을 방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방해하는 사람들로 서 있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지난 날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과거의 잘못 뿌린 씨앗들

저들이 저렇게 된 데는 그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바로 깨달으려면 방해할 수밖에 없는 저들이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산발랏과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거절감, 소외감”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사마리아사람들을 혼혈민족이라고 거절했습니다. 저들도 분명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못들어 오게 했습니다. 그러니 지난 시간에 살핀대로 사마리아 여러 지역에 산당을 짓고 우상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영혼들이 병들어 갔습니다. 예배만이라도 드릴 수 있게 했더라면 오늘날 이렇게 까지 방해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둘째 도비야와 암몬 사람들입니다. “열등감”입니다.

암몬은 모압과 함께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도록 영원히 저주 받은 혈통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쓴뿌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암몬과 모압이 당한 저주가 순전히 그 혈통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라 시킨 것 때문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암몬과 모압이 저주 받은 근본이유는 자신들이 혈통은 저주 받은 혈통이라는“열등감”이었습니다. 모압 사람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열등감이 자존감으로 바꾸어 주기만 하면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아라비아 사람들입니다. “불신앙”입니다.

아라비아(Arabia)는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지역입니다. 서 아시아중에 가장 큰 반도였습니다. 고대의 지리학자들은 이 지역을 세 개의 지역으로 나누었습니다. 1)아라비아 데제르타로 광활한 모래사막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아라비아로 들어간 곳(갈1:17)입니다. 유향과 몰약나무(왕상10:2)와 종려나무(출15:27)가 잘 자라는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마엘 사람(창37:25), 미디안 사람(창37:28)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2)아라비아 페트라이아(Arabia Petraea) 는 가나안 땅 남부 지역으로 남부 에돔 족속, 아말렉 족속, 히위 족속 등이 살았으며 현재는 아랍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 가데스바네아, 브엘세바, 드단, 미디안 땅이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가운데 불타는 성령의 불꽃을 본 곳입니다. 3)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는 비옥한 지역입니다. 페르시아만, 홍해 그리고 아프리카와 인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모슬렘사원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아라비아는 출애굽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지역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촌을 경험했던 곳입니다. 성막 설계도를 받은 곳, 두 돌판에 하나님의 친필로 십계명이 새겨졌던 시내산이 있던 곳. 반석에서 샘물이 솟았던 므리바 반석이 있던 곳, 광야 40년 성막교회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가데스바네아 38년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셨던 초자연적인 역사의 장소였습니다. 이것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바로 아라비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지금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입니까?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앙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온갖 기적을 눈으로 보아도 안 믿어진다는 것은 실로 마음이 불타버린 심령인 것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사람들이 화인맞은 가롯 유다같은 심령입니다. 딤전4:1-2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넷째는 아스돗 (Ashdod) 사람들입니다. “망각”입니다.

블레셋 주요 도시 다섯 개 가운데 하나로서, 거짓 신 다곤에 대한 숭배가 행해진 블레셋의 종교 중심지였습니다. 블레셋이 벱궤를 빼앗아 다곤의 신전에 두었습니다. 아침에 나가보니 다곤 상이 머리가 떨어져 나가있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스돗 도시 사람들의 몸에 독종이 나서 고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체험했으면서도 또 다시 방해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망각입니다. “망각”입니다.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은혜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그 원인을 기억해내야 합니다. 베드로는 “네가 새벽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베드로가 듣기에도, 다른 제자들이 듣기에서 참으로 민망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자마자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말씀이 생각났기에 울었고 그 울음이 순교자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다시 손잡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부탁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은혜가 생각나야 합니다. 영혼이 생각나야 합니다.

 

다섯째 유다 사람들입니다. “갈등”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4:10)

모든 싸움에서 치명적인 패배의 원은 바로 내부의 스파이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방해는 외부적인 방해였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의 방해는 내부의 방해였습니다. 내부의 방해는 내면의 흔들림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감격해서 섬깁니다. 예배도 기쁘고, 헌금도 기쁘고, 봉사도 춤을 추며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식어갑니다. 마음이 식어지면서 ‘못하겠다’는 말이 시작됩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꼭 이런 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생깁니다.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육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4:11-12).

그래서 의리라도 지켜 보려고 하는데, 먼저 있던 유다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힘들어도 신앙을 지켜보려고 애를 쓰는데 ‘남편’이 달려들고, ‘아내’가 달려듭니다. 자식들이 사춘기를 무기로 달려듭니다. 주일날 아침 10시 반 쯤 되면 친구가 찾아옵니다. 초원으로 가잡니다. 그것도 열 번씩이나 찍어댑니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한번쯤은 넘어갑니다. 한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네 번 되다가 영영“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또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방해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방어를 해야 할까요?

느헤미야가 그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4:13-14절입니다.“13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첫째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만만해질 때까지 기도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둘째는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는 것입니다.

종족의 구원이 정말 급하구나! 가족 구원에 관심이 없으면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방해에 대처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가족, 내 종족에 대한 간절함이 생기면 용기가 생깁니다.

 

최순철목사 - 03/2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