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7:7-38

J.D.그리어 목사가 쓴 복음본색에 인용한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 어느 늦은 밤 로스앨젤레스 외곽의 고속도로를 운전해 가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 지역에 갑자기 심한 지진이 지나갔고, 남자는 차를 갓길로 세워 지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지진은 심각했지만, 곧 진정되었다. 남자는 다시 차를 몰아 왼쪽 다리로 진입해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 절반쯤 지났을 때 그는 바로 앞 자의 미등이 사리진 것을 발견했다. 급하게 차를 세우고 나온 그는 다리의 기 부분이 지진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앞에 있던 차는 전 속력으로 달려 다리 아래로 곤두박질 친 것이다.

남자가 돌아보니 몇 대의 차가 붕괴 현장을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미친 듯이 손을 휘저었다. 새벽 세시 로스앤젤레스 외곽 다리를 차를 건너는 사람들이 길가에 선 미친 듯한 사람을 보고 차를 세울 리가 없었고, 그는 네 대의 차가 자신을 지나 저 아래 죽음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때 큰 버스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 버스가 다리에서 추락해야 한다면 자신도 함께여야 할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서 팔을 저었다. 버스는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깜빡였지만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버스 기사는 위험한 상황을 확인하고, 더는 차들이 지나치 못하게 버스를 기울여 세웠다.

만일 당신이 다리 붕괴를 발견한 사람이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는가? 아마도 그 남자가 했던대로 사람들이 멈추기를 열정적으로 간청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이 무너진 다리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파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하루에도 수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곳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 나를 멸망당하지 않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포기하셨는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으로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 감동된 순간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거룩한 생각을 일으켰습니다. 옛적에 바벨론왕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 중에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잊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감동을 따라 말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이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무엇을 위하여입니까?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부르심에 기꺼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일어선 것입니다. 그렇게 일어서서 돌아온 사람들이 42,360명이었습니다.

열두 지도자들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의 이름대로 저들은 예수아처럼‘저희 백성을 건질자’였습니다. 느헤미야처럼‘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아사랴는‘여호와께서 돕는 자’였습니다. 라아먀는‘여호아께서 격동하셨다’, 나하마니처럼‘여호와께서 위로하셨다’비그왜처럼‘행복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이런 품성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은혜속에 임합니다. 돕고자 하는 마음속에 여호와의 감동이 임합니다. 위로자요, 행복케 하는 자속에 감동이 임합니다.

오늘은 감동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포로생활에서 조차 안정된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 지위 다 내려 놓고 백성들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첫째는 지도자를 따라 나선 자손들

1차 하나님께 감동된 사람들을 따라 나선 자손들의 이름이 8-24까지 나옵니다.

바로스 자손, 스바냐 자손, 아라 자손,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 엘람 자손, 삿두 자손, 삭개 자손, 빈누이 자손, 브배 자손, 아스갓 자손, 아도니감 자손, 브그왜 자손, 아딘 자손,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 하숨 자손, 베새 자손, 하립 자손입니다. 17개 자손들입니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얼마나 생명력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그 이름들을 낱낱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 이름들이었습니다. 몇 사람만 설명하겠습니다.

9절에 ‘스바댜’는‘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는 뜻입니다. 심판을 당하는 중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372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10절의 아라는‘여행자’라는 뜻입니다. 포로 중에도 정처 없이 떠돌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라는 소리를 듣고 652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집이나 재산이 없어도 믿음의 가문을 세우고 번창하였습니다.

11절 ‘바핫 모압’은 ‘모합의 통치자’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어떻게 모압의 통치자가 되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모릅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려운 환경에 눌리지 않고 상황을 뛰어넘는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엘람은“높은 지대”, 삿두는 ‘사랑스럽다’, 삭개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 빈누이는 ‘건축하다’, 브배는 ‘아버지같이 자비롭다’, 아스갓은 ‘하나니은 강하시다’, 아도니감은 ‘주께서 높이셨다. 이런 지도자들 밑에서 적게는 42명(28절 벧아스마웻 사람), 많게는 3,930명(38절 스나아 자손)이 따랐습니다.

스나아 3,930명 7:38“스나아 자손이 삼천 구백삼십 명이었느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스나아의 자손이었습니다. 무려 3930명이나 되었습니다. 스나아는‘미워하다, 증오하다’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성벽재건을 담당한 곳은 어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들고 나는 문이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목마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하여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자신의 삶을 증오했거나 미워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느헤미야를 만나면서 저들에게 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나아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음성을 따라 갔을 때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증오스럽고, 자신의 삶 조차 미워했었던 스나아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감동을 따랐더니 가장 많은 사람이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자신의 삶이 한심스럽고 답답하다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르기만 하면 다시금 생명력이 살아나는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역 사람들

느헤미야 7:8-24절까지는 사람을 따르는 자손들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25절부터 38절까지는 지역사람들로 구분하여 기록했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느 토양에서 살아가느냐도 중요합니다.

 

25절부터 나오는 성읍은 거의 베냐민 지파에 속한 곳이라고 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열두 지파중에 가장 미약한 지파입니다. 사사기 20장을 보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사람이 레위 사람 여자를 죽였다가 레위와 베냐민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사소한 싸움이 종족전쟁으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칼을 쓸줄 아는 베냐민 지파 용사들 수만 명이 멸족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벽재건의 역사의 현장에 베냐민 후손들의 이름이 허다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 베냐민 지파에서 사도 바울이 태어났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한때 잠깐의 실수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 실수로 피흘림과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베냐민 지판은 달라졌습니다. 유다 족속과 함께 예루살렘을 지키고 성전을 지어드리며 예배을 위해 목숨을 다하였다는 사실입니다.

 

26절에 베들레헴과 느도바 사람이 일백 팔십 팔명이요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나실 곳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산간 지역이고, 초라하고 양치기들이 고양처럼 가난하고 한적한 곳이었지만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베들레헴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집, 떡집의 토양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이 언젠가 복을 주시고 유명케 하십니다. 복음이 있으면 기적을 일어납니다.

27절에 “아나돗 사람이”이 나옵니다. ‘아나돗’은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임하고 말씀이 임하자 믿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영광이 임하고 은혜가 넘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28절부터 보면 ‘벧아스마웻 사람(강한 죽음), 믹마스 사람(감추어졌다), 벧엘(하나님의 집), 아이 사람(무더기와 폐허), 그리고 여리고사람(향기롭다)이 나옵니다.

37-38절“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나옵니다. 하딧(날카롭다), 오노(힘이 세다) 입니다.

28절의 벧아스마웨부터 스나아까지 대부분의 이름이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을 것 같고, 감추어지고, 폐허가 되고, 날카롭고, 가시가 많아도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여리고처럼 향기로룬 믿음이 성입이 될 것입니다. 성도는 어디에 가야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기보다는 내가 사는 그곳을 믿음의 성읍이 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그곳이 믿음의 장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자유와 복음

사도 바울의 생애에서 저에게 가장 감동을 주고 저를 따라오게 만드는 도전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16-34절의 내용입니다.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16절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한 소녀를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했습니다. 그런데 보상은 고사하고 로마 법대로 매를 맞았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였습니다. “25절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절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한 두 사람의 기도와 찬양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매임을 풀어낸 것입니다. 한 두 사람만이라도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해드린다면, 배고픔속에서도 드리는 찬양도, 병들어 죽어가는 아픈 자의 신음소리 섞인 찬양으로도 하나님은 오늘 이시간 지진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옥 문들이 열렸습니다. 바울의 매인 것이 벗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베드로를 위하여도 같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로마감옥이 지진에 흔들리는 순간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된 것일까요? 애매한 나를 가두더니 꼴 좋다고 외쳤을까요? 그러면서 유유히 걸어 나오면서 손을 흔들었을까요? 겉으로 보면 이것은 당연히 기도의 응답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붙들린 바울을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순간 바깥으로 걸어나가려고 하는데, 저만치에서 칼을 빼들고 자결을 하려는 로마군인이 보였습니다. 당시 법은 간수가 죄수를 지키지 못하고 탈주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바울은 자유했지만 감옥에 갇힌 또 다른 사람을 본 것입니다.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택할 것인가? 로마 간수를 택할 것인가?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가 주신 자유를 등 뒤로 하고, 간수와 복음을 나누기 위해 고의적으로 더 깊은 감옥으로 향하여 걸어간 것입니다.

이 일에 압도된 로마 군인은 무서워 떨며 말합니다. “30절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간수의 반응속에는 다른 질문 하나가 마음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바울 선생님!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 이유를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밝혀 줍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늘나라의 자유를 등 뒤로 두고 우리들이 얽매임속으로 들어와 주셨다고 말합니다(빌2:5-11).

감동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감동의 재생산입니다.

 

 

실례 : 누군가 찰스 스펄전에게 예수님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이 대답은 “그럴 수 없다고 믿습니다만 더 나은 질문은 ‘예수님을 알고도 그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들인가’하는 것입니다.”

 

최순철목사 - 07/06/14